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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자아에서 자연으로, 그리고 우주로

              - 조각가 유용환의 작품-

                       

     들꽃과의 조우

예술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안다. 그것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모양을 구별할 줄 알며 자신에게 어떤 뜻을 선사하는지 인식할 줄 안다. 자잘한 것까지 헤아릴 수 있는 와 볼 수 있는 과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녔다.

작가는 2천년을 임계점으로 하여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작업실 근처의 들판을 산책하다 우연히 들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부터다. 그 강렬한 감흥으로 그는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유용환씨의 작품은 꽃과의 만남을 전기(轉機)로 새 창작의 포문을 열었다. 그가 보았을 들꽃들이 어땠는지 소상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떤 감흥을 들꽃으로부터 전달받았는지를 추측하는 것마저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따금씩 산행을 가거나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산과 들을 무성하게 수놓은 풀들은 사실 굉장한 난관을 딛고 탄생한 산물이다. 추운 땅에 씨가 떨어져 수개월을 깊은 지하의 어둠속에서 대지위로 솟아오를 소망을 가지고 눈물로서 아픔을 견딘다. 봄이 왔다고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세찬 비바람과 추위와 싸운 뒤에야 비로소 어엿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보기는 쉽지만 유용환씨가 경험한 들꽃은 이런 제련(製鍊)의 과정을 경유하는 것이며, 바로 이 위에서 들꽃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모진 연단의 과정없이 꽃의 영화로움은 탄생하지 않는다.

작가의 <합으로>(2001),<합으로-꽃잎세상>(2002),<이 놀라운 세상>(2004)은 들꽃의 감동에 착안하여 나온 작품들이다. <합으로>가 진짜 잎사귀가 옆으로 편안하게 누운 모양을 하고 있다면, <꽃잎세상>(스텐레스 스틸)은 잎사귀가 다발로 엮어져 덩어리를 이룬 모양을 하고 있고 또다른 <꽃잎세상>(화강석)은 꽃잎을 클로즈업하여 몇 백배로 확대한 것이다. <컵속의 일기>(2003) 역시 비슷한 흐름속에 있다. 컵속에 물이 담겨 있는 모양을 디자인한 스틸작품인데 물거품이 마치 꽃잎의 곡면처럼 부드럽고 매끈하다. 모든 대상을 시적(詩的)이며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공간의 구축과 변용

이런 흐름은 <합으로>,<합으로의 선율>(1998),<다섯만으로>(2000),<빛의 노래>(2002)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가 공간과 물질의 상호관계에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것은 재료는 스틸 혹은 스텐레스 스틸로 바꾸면서부터다. 절단과 용접, 그리고 밴딩이 가능해지면서 재료를 다루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다. 공간이란 엔진에다 자유자재로 구축과 변용을 가동시켰다.

위의 작품을 보면 종전의 브론즈나 석조작품에 비해 조형의 표현이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세우고 펼치고 접고 기울이고 잇고 오려내는 등 조형을 전개하는 수법이 훨씬 다채로워 졌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 기본적인 변화는 칼라가 도입되었다는 측면일 것이다.

빨강,파랑,보라 등 몇가지 색이 들어가고 그것들을 서로 대비시킴으로써 그의 작품은 밝아졌을 뿐만 아니라 생기가 넘쳐 보인다. 물론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2000년도 이후, 그러니까 들꽃과 잎새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서 두드러지지 않나 싶다.

몇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이 놀라운 세상>(2004)의 경우 이런 표현이 극적으로 잘 활용된 작품이다. 충무아트홀에 설치된 이 작품은 선명도 높은 색깔이 두드러진다. 대지 위에 새 싹이 솟아나고 그 위에 바람이 지나가며 꽃씨를 뿌려주는 장면이 한 편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공간시 -끝없는 선율>(2004)로 명명된 작품 역시 유기적인 형태로 마음껏 자연적인 감흥을 실어낸다. 네 부분으로 이뤄진 이 조형물은 간략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언어로 얼개지어져 있다.

작가의 섬세한 조형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들은 이중형태로 되어 있는데 물체를 에워싸는 부드러운 곡면과 투각으로 된 안의 곡면이 서로 다르면서도 절묘하게 조응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로 다른 형태가 어우러져 삐꺽거리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뤄낸다.

부채꼴로 펼쳐진 꽃봉오리같기도 하고 잎사귀같기도 하고 무지개같기도 한 형태들이 형형색색 제 표정을 지니면서 감상자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다. 그가 경이로운 자연의 마당에서 들꽃들과 눈빛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듯이, 생명 하나하나를 사랑하고 포용하게 된 내막을 우리에게 공개해주는 듯하다.

 

희망과 긍정으로

작가의 작업에 모종의 변화가 포착된 것은 1990년 직후가 아닌가 싶다. 마그리트의 기묘한 느낌을 안겨주는 전치작품에 심취하였던 그가 나이가 들면서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작업세계를 천착해가기로 다짐하게 된 것이다. 하기는 이전의 작업도 그의 손과 가슴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겠으나 작가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희망과 긍정의 인생철학을 발견하고서 유용환씨는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 질적인 도약을 맞이하게 된다.

기회는 불현듯 찾아왔다. 향후 작업의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중 때마침 올림픽기념공원의 공모에 <꿈속>(1990)이 당선되었다. 유려한 곡선이 음악처럼 흐르는 공간에 관한 충동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그간 눌려 지내온 미적 감각이 살아나면서 작품이 훨씬 유순해졌고 감미로워졌다. 비관과 회의, 아고니같이 것이 긍정적 요인으로 전환되면서, 마치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왔을 때처럼 환해졌다.

199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나온 <애율> 시리즈와 <화율> 시리즈는 그의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준다. <애율>이 여성을 모티브로 한 선적인 아름다움과 일종의 리듬감을 살린 것이라면,<화율>은 구체적인 대상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오직 선과 면, 공간에 의해 부드러운 리듬감과 적당한 발란스를 전달해준다. 같은 선이더라도 안톤 펩스너같은 무지막지한 강철이 휘어지는 강렬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헨리 무어처럼 해변의 조개나 강가의 매끄러운 표면의 자갈이 갖는 완만한 성질의 것이다. 그의 작품이 격정과 같은 심리적 술렁임 대신 온화평정과 같은 차분한 분위기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애율>의 선적 아름다움과 <화율>의 발란스는 <합으로의 선율>(1998)에 와서 종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합으로의 선율>은 곡선과 곡면, 그리고 상생하는 이미지의 총화로 구성된다. 바바라 헵스쓰나 한스 아르프의 유연성을 연상시키는 <합으로의 선율>은 종래에 보이던 긴장감이나 음울함같은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함께 걷고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의지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정을 나누는 모습이 나타난다.

거창하게 말하면,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랄까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 것같다. <합으로의 선율>이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듯이 이 연작은 평화를 갈구하는 작가의 의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도 ()’이라는 평화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존속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전쟁없는 세상, 각종 범죄와 사회악이 근절된 평화로운 사회, 이혼없는 가족, 양심과 욕구,정신과 육체 사이의 갈등 등 따지고 보면 모두 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사태이다. 어떤 면에서 의 궁극적 지점은 모두가 동경하는 화해의 세상으로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작가를 평화를 노래하는 예술가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주위의 것을 포용의 자세로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데서 그의 작품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유의해서 바라볼만한 대목이다.

그의 작품에 담긴 합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필자는 문뜩 팡세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공간을 수단으로 삼으면 우주가 나를 담아 한 점의 미세한 얼룩처럼 삼켜버리지만,사고를 수단으로 하면 내가 우주를 이해한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공간, 즉 물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고, 즉 영혼에 의해 확장된다는 주장이다.

백번 옳은 말이다. 인간본성을 이해하는 첩경인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물질의 양과 비례하거나 야심적인 획득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안에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 내용이 들어가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유용환씨의 작품은 이점에서 팡세의 주장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순수한 영혼에 이끌려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종국적으로 우주를 이해하는높은 경지로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서성록(미술평론가)